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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고려시대

삼국시대

삼국시대 유물

백제국의 기초 위례성

건국설화
B.C. 1세기 말엽경 한반도의 중심부인 서울지방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세력에서 분파하여 남쪽으로 이주해 온 온조ㆍ비류 집단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세력으로 한강 이남의 마한 50여개국을 통합하여 백제국을 건설하는 주체가 되었다. 온조집단은 한강유역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성읍국가(城邑國家)로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 위례성의 위치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위례성의 위치는 충정도 직산(稷山)으로 인식하여 왔으나 조선후기부터 위례성은 한강이북에 존재한다는 이설이 제기되고 다산 정약용에 이르러 한강이북임이 논증되었다. 또한 정약용의 견해는 조선말기 지리ㆍ지도학인 고산자 김정호에 이어져 한강이북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삼각산 동록(東麓)설과 세검동 일대설이 있어 정립되어 있지 않다.

고구려의 한강유역 확보와 남평양(南平壤)

  • 진출경위
    5세기 말엽(475) 고구려의 백제 도성(광주, 廣州) 함락과 백제의 웅진(공주) 천도는 중대사건으로서 백제의 남쪽 천도로 한강유역의 중요지대는 백제의 수중에서 고구려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북한산군(郡) - 남평양(南平壤)설치
    고구려는 새로운 개척지인 서울방면 지역에 북한산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명칭으로 남평양이라 불렀다. 남평양이란 고구려의 별도(別都)로서 고려의 삼경제(三京制)와 같이 평양에 천도한 후로 별도로서 국내성(만주 집안)을 두었던 것이며 한강유역의 새로운 개척지에 남평양을 둔 것은 고려의 삼경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통일과 한양군(漢陽郡)

  • 한양군 설치
    7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두고 삼국간에 공방이 치열하였으나, 무열왕 7년(660)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고, 문무왕 8년(668) 에는 고구려도 나당군에 의해 멸망되자, 신라는 통일지역에 9주 5소경(小京)제 실시함으로써 지금의 서울지방은 한산주(광주)에 편입되었다. 한산주의 관할구역은 경기도ㆍ충청북도ㆍ황해도의 대부분이 속한다. 경덕왕 16년(757)에 한산주는 한주로 개칭되었고, 당시 서울지방은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그동안 북한산주에서 한성 등으로 호칭되던 것이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한주에 예속되었다.
    한양군의 역할과 기능의 변화
    군사기지에서 민사행정지역으로 편제 북한산성과 한성이 고구려 당시에는 남별도로서 주요 군사기지였으나, 통일신라 이후 정치ㆍ 경제ㆍ군사적 면에서 그 중요도는 상당히 줄어드는 대신 한양군은 군사기지에서 명실공히 행정구획에 편제된다. 그후 한양군은 신라말까지 한주의 예속 군으로 지속되었으며, 고려왕조를 창건한 태조 23년 양주(楊州)로 개칭되기까지 명칭은 변함이 없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 유물

보협인석탑(寶협印石塔, 국보 제209호,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재) 고려시대에 중구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은 대체로 국초(國初)에서 정종(1035~1046) 때 까지는 양주(楊州),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말까지는 한양(漢陽)으로 불리웠다.

고려전기의 양주(楊洲)

고려초 왕실의 직할지로써 양주지방
고려초기의 지방형편은 전국의 각 지방이 대부분 그 지방에 기반을 가지고 있는 유력한 호족들에 의하여 분할ㆍ점유되어 있으며, 고려정권은 이들 호족들을 연합하여 성립시킨 것이었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이들 지방에 간섭하여 지방제도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자유로이 관할ㆍ통치할 수 있는 지역은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이는 최승로(崔承老)의 봉사문(封事文)에「우리 성조(聖祖)께서 통합한 뒤에 외관(外官)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初創)으로 인하여 일이 번거로워 겨를이 없었다」고 한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약했던데 비하여 지방의 호족세력은 대단히 강력하 였기 때문이었다.이렇게 볼 때 서울지방의 인접지역은 광주(廣州)나 시흥(始興)일대는 호족들의 세력권 안에 있던 지역이었으나, 서울지방인 楊洲일대가 태조 당시에 어떤 호족의 근거지였다는 것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몇가지 자료를 통하여 보면 고려초기의 서울 지방은 정부의 직할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삼국사기 궁예전 광화(光化) 원년(元年, 898)條(조)에「(궁예가)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삼아 楊洲(현재의 서울지방)와 현주(見州 현재의 양주지방)를 쳤다」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楊洲지방은 태봉(泰封)에 있어서 양주의 지위는 정부의 직할지였을 가능성이 많으며 이러한 상황은 고려까지 계속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당시에 양주지방에 토착적인 호족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호족이 비록 고려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견훤에게 식읍으로 하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 지방제도 정비와 양주목(楊洲牧)
    광종(光宗)은 즉위 7년부터 호족세력의 제거와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광종 7년(956)에 노비안검법을 제정하여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를 해방시킴으로써 호족들의 경제ㆍ사회적 기반을 삭감을 도모하는 한편 9년에 후주(後周)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를 시행하고 11년에는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왕권의 강화책과 관계 있는 제도의 설정을 기도하였던 것이다.光宗에 의해 추진된 왕권강화책(王權强化策)은 초기 이래로 왕실의 안정과 질서를 문란케하는 호족의 세력을 꺾고 성종대(成宗代)에 이루어지는 지방행정제도의 정비를 위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成宗이 지방제도의 정비에 착수한 것은 그의 2년(983)2월이었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외직조(外職條)에 의하면 이때 처음 으로 전국에 12牧(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 설치하였다 했다.
  • 지방제도의 개편과 양주목(楊洲牧)
    성종(成宗)은「孝」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윤리에 근본을 둔 중앙집권적인 儀禮國家(의례국가)를 건설하려 하였으며, 지방 유학자를 등용 하여 왕권의 안정을 기하는 동시에 중앙집권적인 이상적 정치형태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성종 12년의 거란의 침입을 계기로 압록강에서 청천강사이에 살고 있던 여진인을 쫓아버리고 이곳에 강동(江東)6주를 설치함에 따라 지방제도의 개편이 필요하게 되었다. 성종14년에 10도제(道制) 실시와 아울러 12州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게되었으며, 이는 군사적인 면을 크게 강화한 것으로 12州의 목(牧)을 폐지하여 군(軍)으로 삼고, 州의 장관도 牧使에서 節度使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12州에는 각각 軍號를 붙였는데 楊洲는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이러한 지방관제의 개편 정비는 목종(穆宗)대에 이르러 크게 후퇴하였는데 목종8년에 관찰사(觀察使), 도단련사(都團練使), 단련사(團練使), 자사(刺史) 등 외관을 모두 도태시키고 12절도(節度), 4도호(都護), 동서북계 방어진사(防禦鎭使), 현령(縣令), 진장(鎭將)만을 남겨 100여 개 고을의 지방관이 도태되어 민사적(民事的) 성격이 위축되었으며, 군사적(軍事的) 성격을 띤 직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顯宗)대에 이르러 지방제도의 새로운 변화가 있게 된다.
  • 민정적(民政的) 성격이 강화된 양주(楊州)
    현종 3년에 12절도사를 75도안무사(道按撫使)로 바뀐 것은 지방통제의 강화를 뜻하며, 현종9년에 안무사를 혁파하고 4도호, 8목과 56지주군사(知州軍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지방관제는 4도호, 8목을 중심으로 중앙에서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56개의 州ㆍ郡과 28개의 鎭, 그리고 20개의 縣으로 편성되어 중앙의 지방통제가 다시 민사행정의 성격을 강화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방관제 개편에서 지금까지 안무사 지위에 있던 양주는 牧으로 환원되지 못하고 양주지사, 즉 知事州로 격하하고 말았다.

고려중기의 남경

  • 문종(文宗)의 남경(南京)설치
    양주는 문종때에 이르러 일약 남경으로 승격하여 西京ㆍ東京인 평양ㆍ경주와 더불어 고려의 삼경제(三京制)를 이루는 지방행정구획상의 근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南京의 설치는 지리도참사상(地理圖讖思想)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선(道詵)이 지었다고 하는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에 의거하여 地力을 빌어서 국가의 기업(基業)을 연장하려고 예성강변의 병악(餠岳)에 장원정(長源亭)을 짓고 길일을 택하여 순주(巡駐)하였으며, 서경에 서경기(西京畿)를 두고 좌우궁(左右宮)을 지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南京의 설치는 도참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숙종(肅宗)의 남경 건도(建都)
    문종때에 설치된 남경은 머지않아 폐지되고 楊洲로 환원된 것으로 보이며, 서울지방은 숙종때에 이르러 다시 남경으로 승격되어 근기지방 (近畿地方)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남경의 규모는 동서로는 대봉(大峰) 즉 오늘날 낙산(駱山)에서부터 지봉(岐峰) 즉 안산(鞍山)에 이르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사리(沙里), 즉 용산 한강변에서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구지역은 남경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남경의 크기는 지금의 서울 도심지역을 합한 것만큼의 큰 규모였다.

고려후기의 한양(漢陽)

  • 서울지방이 남경으로 승격된 후 2세기만에 다시 한양부로 격하ㆍ개편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즉위한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개편하면서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함과 동시에 부윤(府尹)ㆍ판관(判官)ㆍ사록(司錄)의 관제를 마련하였다. 이때 서경은 평양부, 동경은 계림부로 고쳐졌으며, 그 외 많은 부가 설치됨으로써 고려의 삼경제는 소멸되었다. 따라서 한양부는 다른 부와 마찬가지로 왕의 순주와 어의안치(御衣安置) 등은 사라지고 개경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유행(遊幸)과 사냥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륙의 원(元)이 쇠퇴기에 접어들고 고려왕실에서도 元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면서 한양부는 한양부는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의 배원사상(排元思想)에 의거한 관제의 환원정책과 천도(遷都)계획이 그것이었다.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약 6개월간을 한양에 머물고는 이어 9년 2월에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고 말았으며, 4년 여 개경에 머물면서 다시 항구적인 천도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의 천도결의도 무산되어 한양은 또다시 지방행단위의 위치로 돌아가고 말았다.
  • 고려말(高麗末)의 한양천도론(漢陽遷都論)
    공민왕 즉위 5년 친원적(親元的) 정치세력을 거세시키고 원의 고려에 대한 통치기구였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동시에 군사행동을 일의켜 동ㆍ서북면의 옛 영토의 회복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의 와중에 충선왕의 즉위와 동시에 격하되어 한양부로 되었던 서울지방은 문종때의 제도로 환원 남경으로 호칭된 듯 하다. 공민왕이 남경으로의 천도를 꾀하였던 것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하여 변방의 화란(禍亂)(홍건적의 침입, 왜구의 창궐)이 그치지 않고, 국내 정치정세가 유동적인데다가 권신간의 대립과 알력이 계속되자 地力이 흥한 곳인 남경으로 천도함으로써 국가의 기업을 융성케 하며 또 새로운 체제 아래서 국정을 일신해 보려는데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경성곽(城郭) 및 백악(白岳) 궁궐(宮闕)의 축조가 진전되는 가운데 기근과 외환으로 민생고가 막심한 것 등을 들어 극력 반대하는 여론이 악화되었으며 태묘(太廟)의 점을 친 결과가 불길하였던 까닭에 천도는 중지되고 말았다.
  • 한양천도(漢陽遷都)
    공민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우왕(禑王) 7년에 이르면서 천도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는데 이번에는 천도 대상지역도 장서(長湍)ㆍ철원(鐵原) 등지가 아닌 한양으로 변하였다. 우왕 8년 재차 천도론이 대두되면서 드디어 우왕이 한양으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때의 천도는 임시적인 것으로서 잠깐동안 변이를 피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약 6개월간을 한양에 머물고는 이어 9년 2월에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고 말았으며, 4년 여 개경에 머물면서 다시 항구적인 천도를 계획하고 있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의 천도결의도 무산되어 한양은 또다시 지방행단위의 위치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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