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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정도 600년, 그 중심에서 빛나는 전통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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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이행(李荇, 1478~1534)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水)·청학도인(靑鶴道人)이다.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입조(入朝)하여 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 등을 지냈다. 문집으로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설명
이행(李荇, 1478~1534)은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등 관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학문적으로 높은 자질을 가진 이들에게 주어졌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할 만큼 학문과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이후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의 관직에서 두루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행이 생존하였던 시기에는 신진 선비들이 화를 입게 되는 사화(士禍)가 빈번하여 정국이 불안하였다. 그러나 이행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할 말은 하는 인물이었다. 1504년(연산군 10) 홍문관에서 재직 중이던 이행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다. 이 사화로 인해 절친한 친구였던 박은(朴誾)도 세상을 떠났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한 이행은 승진을 계속하여 1517년(중종 12)에는 대사헌이 된다. 그러나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에 의해 배척받아 사직한 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실각하자 다시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여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행은 정승의 신분으로 남산 아래 청학동(현 중구 예장동 일대)에 집을 지어 거주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가 정국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력을 독차지함)하자 이를 비판하다가 김안로 일파의 반격으로 유배되어 평안도 함종(咸從)에서 사망하였다.
이행은 문장과 글씨 및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서적의 간행에도 기여하였다. 1530년(중종 25)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책임을 맡아 잘 완수한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박은의 시문집을 편집하여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를 엮었으며, 개인문집으로 《용재집(容齋集)》을 남겼다. 특히 이행은 시에 매우 뛰어났기에 이를 인정받아 박은과 함께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로 평가받고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었으나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역사정보
1478 출생, 남산 아래 청학동(현 중구 예장동 일대) 거주 1495 증광문과 병과 합격 1534 사망
시대분류
조선/1478~1534
주제분류
문화/인물/기타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지역
서울특별시 중구
인물
1478년~15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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