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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정도 600년, 그 중심에서 빛나는 전통도시

중구의 역사

1. 백제국의 기초 위례성

건국설화
B.C. 1세기 말엽경 한반도의 중심부인 서울지방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는데,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세력에서 분파하여 남쪽으로 이주해 온 온조ㆍ비류 집단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력으로 한강 이남의 마한 50여개 국을 통합하여 백제국을 건설하는 주체가 되었다. 온조 집단은 한강유역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성읍국가(城邑國家)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위례성의 위치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위례성의 위치는 충정도 직산(稷山)으로 인식하여 왔으나 조선후기부터 위례성은 한강이북에 존재한다는 이설이 제기되고 다산 정약용에 이르러 한강이북임이 논증되었다. 또한 정약용의 견해는 조선말기 지리ㆍ지도학인 고산자 김정호에 이어져 한강이북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삼각산 동록(東麓)설과 세검동 일대설이 있어 정립되어 있지 않다.

2. 고구려의 한강유역 확보와 남평양

진출경위
5세기 말엽(475) 고구려의 백제 도성(광주, 廣州) 함락과 백제의 웅진(공주) 천도는 중대사건으로서 백제의 남쪽 천도로 한강유역의 중요지대는 백제의 수중에서 고구려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북한산군(郡) – 남평양(南平壤) 설치
고구려는 새로운 개척지인 서울방면 지역에 북산산군을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또 다른 명칭으로 남평양이라 불렀다.남평양이란 고구려의 별도(別都)로서 고려의 삼경제(三京制)와 같이 평양에 천도한 후로 별도로서 국내성(만주 집안)을 두었던 것이며, 한강유역의 새로운 개척지에 남평양을 둔 것은 고려의 삼경제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3. 삼국통일과 한양군(漢陽郡)

한양군 설치
7세기 중엽 한강유역을 두고 삼국간에 공방이 치열하였으나, 무열왕 7년(660)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고,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도 나당군에 의해 멸망되자,신란는 통일지역에 9주 5소경(小京)제를 실시함으로써 지금의 서울지방은 한산주(광주)에 편입되었다. 한산주의 관활구역은 경기도ㆍ충청북도ㆍ황해도의 대부분이 속한다. 경덕왕 16년(757)에 한산주는 한주로 개칭되었고, 당시 서울지방은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그동안 북한산주에서 한성 등으로 호칭되던 것이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한주에 예속 되었다.
북한산군(郡) – 남평양(南平壤) 설치
군사기지에서 민사행정지역으로 편제 분한산성과 한성이 고구려 당시에는 남별도로서 주요 군사기지였으나, 통일신라 이후 정치ㆍ경제ㆍ군사적 면에서 그 중요도는 상당히 줄어드는 대신 한양군은 구사기지에서 명실공히 행정구획에 편제된다. 그후 한양군은 신라말까지 한주의 예속 군으로 지속되었으며, 고려왕조를 창건한 태조 23년 양주(揚州)로 개칭되기까지 명칭은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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