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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서울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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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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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지도보기
  • 문의 및 안내 숭례문 관리소 02-779-8547~8
  • 이용시간 [개방시간] 09:00~18:00 , ※ 6~8월은 18:30까지 개방, ※ 12~2월은 17:30까지 개방
  • 주차시설 없음
  • 홈페이지

개요

이 건물은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을 둘러싸고 있던 도성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입니다.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숭례문은 삼남지방(경상·전라·충청)과 연결된 한강과 가까워 상업이 발달하는 조선 후기에는 숭례문 안팎으로 시장이 발달했습니다.

숭례문, 이름에 담긴 의미
숭례문 이름이 적힌 현판을 이해하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문화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사회였습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이 지켜야 할 5가지 덕목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입니다. 한양의 사대문 이름에 이 덕목을 넣었는데, 숭례문에는 예절을 뜻하는 예(禮)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풍수지리 사상을 도입해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 불의 기운을 막으려 했습니다. 한양도성 남쪽에는 불기운이 센 화산(火山) 관악산이 있습니다. 숭례(崇禮)라는 한자를 세워놓으면 마치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관악산 불기운에 맞서 세워 놓아 한양도성 내에 발생하는 화재를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숭례문의 쓰임새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남문이자 정문입니다. 중국의 궁궐건축에 관한 책인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내용에 있는 “제왕은 남면하여 만백성을 굽어본다”에 따라 지어진 것입니다. 도성의 정문이었기에 동대문을 제외한 다른 문과 달리 이층으로 세워 그 격을 높였습니다. 조선은 외국 사절단이 들어오는 문도 나라마다 정해 주었는데, 조선이 황제국으로 인정한 중국 북경의 사절단만 숭례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숭례문은 북쪽 지방을 지나 중국 북경으로 통하는 의주로와 삼남지방의 물자가 모여드는 한강 포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전국의 세곡(세금으로 쓰이는 곡식)과 진상품들을 받아들이는 선혜청이 숭례문 인근에 자리 잡으면서 인근에 객사와 주막, 시장이 형성됩니다. 한양에 사람이 많아지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칠패시장, 서소문 밖 난장, 남문 안 조시장(새벽시장)이 연결되어 한양에서 가장 활기찬 곳이 됩니다. 실학자 이덕무는 그 당시 숭례문을 본 소감을 다음과 같은 시로 남겼습니다. 숭례문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 십 리에 펼쳐진 강가의 창고엔 곡식이 가득하네. / 안개 낀 파도 저 멀리 삼남의 배가 보이고 / 온 강에 빽빽한 돛배는 만 척을 헤아리네.
숭례문의 변천사
숭례문은 1398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이 만들어지면서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1447년(세종 29)에 풍수지리상 약한 곳을 보완하기 위해 바닥에 흙을 쌓아 지대를 높인 다음 성문을 완전히 새롭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1479년(성종 10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습니다. 이후 근대에 와서 일제가 한양을 방어하는 한양도성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 도시계획이라는 이름하에 한양도성을 대부분 허물어 버립니다. 그때 이후로 숭례문은 한양도성과 연결이 끊긴 채 문만 외로이 남아있습니다. 2008년에도 큰 재난을 맞이합니다. 한 개인의 방화로 2/3 이상이 불에 타버렸죠. 이후 문화재청에 의해 5년여 만에 복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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