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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정도 600년, 그 중심에서 빛나는 전통도시

중구의 인물

  • 강세황(姜世晃)

    1712(숙종38)∼1791(정조15)

    강세황

    한성부 판윤을 지낸 서화가로 중구 회현동 남산기슭에서 살았다. 서화(書畵)에 뛰어나 전서·예서를 비롯한 각체에 모두 신묘했고 특히 산수, 사군자 등에 뛰어났다. 당시 화단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했다. 저서로 표암집이 있고, 작품으로 난죽도·묵죽도·산수도·송죽목단도·풍설과교도·계산초청도·연화도 등이 있다.

  • 권람(權擥)

    1416(태종16)∼1645(세조11)

    권람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으로 중구 주자동에서 살았다. 1450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계유정난 때 정난공신 1등으로 우부승지에 특진하였다. 세조 4년에 수찬관으로 「국조보감」을 편찬하였고,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1462년 좌의정에 올라 이듬해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으로 저서로 소한당집(所閑堂集)이 있다.

  • 김상용(金尙容)

    1561(명종16)∼1637(인조15)

    김상용

    조선시대 문신으로 중구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 갔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그 서체는 이왕체를 본뜨고 전은 중체를 겸하였으며, 시조로 유고에 《오륜가》, 《훈계자손가》등이 있고, 그 밖에도 《가곡원류》 등에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저서에 선원유교(仙源遺稿), 독례수초(讀禮隨抄)가 있다.

  •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3)∼1652(효종3)

    김상헌

    조선시대 문신으로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저서에 야인담록(野人淡綠), 풍악문닥(風岳問答), 남한기략(南漢紀略), 독례수초(讀禮隨抄), 청음집(淸陰集) 등이 있다.

  • 김석주(金錫胄)

    1634 (인조12)∼1684(숙종10)

    김석주

    조선시대 문신으로 회현동 2가에서 재산루(在山樓)를 짓고 살았다. 현종 때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 허적 등과 결탁하여 송시열 등의 산당을 숙청하였다. 임술고변으로 경신환국을 일으켜 남인세력을 축출하였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반감을 사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저서에 식암집(息庵集), 해동사부(海東辭賦)등이 있다.

  • 김장생(金長生)

    1548(명종3)∼1631(인조9)

    김장생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서울 누국동(漏局洞) 즉 서소문동 대법원 자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이후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인목대비 폐모논의가 일어나고 북인이 득세하자 낙향하여 예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그의 제자는 송시열 외에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많다. 저서로 경서번의, 근사록석의, 의례문해, 가례집람, 예기기의, 사계연석문대, 사계어록 등이 있다.

  • 김 집(金集)

    1574(선조7)∼1656(효종7)

    김  집

    조선시대 예학(禮學)의 체계를 세운 학자로 서울 누국동 즉 서소문동에서 김장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으로 등용되어 임피현령·지평·집의·공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효종 즉위 후 김상헌과 함께 등용되어 예조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다. 정국이 어수선 해지자 다시 사임했다가 후에 대사헌·좌찬성·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저서에 신독재유고가 있다.

  • 남궁억(南宮億)

    1863(철종14)∼1939

    남궁억

    탑골공원을 꾸민 독립운동가·교육자·언론인으로 서울 왜송골 즉 중구 정동 전 배재중고교 자리에서 태어났다. 궁내부 별군직(別軍職), 칠곡부사(漆谷府使), 내부 토목국장(土木局長) 등을 역임하였고 독립협회에서 활약하였다. 양양군수(襄陽郡守), 대한협회장, 관동학회(關東學會) 회장 등을 지냈다. 배화학당 교사로 있으며 교과서를 편찬하고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저서로 동사략·조선이야기가 있으며 작품으로 가사 《무궁화 동산》·《기러기》·《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 박 은(朴誾 )

    1479(성종10)∼1504(연산군10)

    박  은

    연산군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고령,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읍취헌은 그가 서울 남산 기슭에 살았을 때 지은 당호(堂號)이기도 하다. 승문원(承文院)에 발탁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수찬(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작품으로 《읍취헌유고》가 있다.

  • 박지원(朴趾源)

    1737(영조13)∼1805(순조5)

    박지원

    조선 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로 중구 묵정동에서 살았다.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하였다. 그의「열하일기(熱河日記)」는 당시 보수파에게서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그곳의 실학사상을 소개하였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연암집, 허생전 등이 있다.

  • 상 진(尙震)

    1493(성종24)∼1564(명종19)

    상  진

    상동이란 동명을 남긴 조선시대 노덕대신(老德大臣)으로, 중구 남창동에 집터가 있었으며 남대문로 3가 일대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동이라 하였는데 이는 원래 상정승동이었다. 사관, 예조좌랑, 대사간, 동부승지,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우찬성, 돈령부지사, 중추부지사, 삼정승 등을 지내고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인품이 관후 인자하여 15년 동안 대신으로 왕을 보좌하는 동안 조야의 신망이 두터웠고 명재상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 성 현(成俔)

    1439(세종21)∼1504(연산군10)

    성  현

    국악에 밝은 한성부 판윤으로 한성부 만리현 지금의 중림동에서 태어나 평생 서울에서 살았다. 대사간, 형조참판, 평안도 관찰사, 예조판서, 공조판서 겸 대제학 등을 지냈다. 《악학궤범》을 편찬했고 관상감 등의 중요성을 역설, 격상시켰다. 문집 《용재총화》는 조선 전기의 정치·사회·제도·문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저서로 허백당집·풍아록·부휴자담론·경륜대궤 등이 있다.

  • 유성룡(柳成龍 )

    1542(중종37)∼1607(선조40)

    유성룡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재상으로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성리학의 대가였던 그는 대사헌·경상도관찰사 등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권율 같은 명장을 천거하여 국난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임진왜란 때 겪은 뼈저린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을 저술하였다. 유성룡이 어린 시절 조선시대 한양 남부에 위치한 ‘묵사동(墨寺洞)’ 또는 ‘먹절골’이라 불린 현재 필동지역에서 보냈으며 말년인 1598년에 북인(北人)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削奪)되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그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 안동 옥연서당(玉淵書堂)에 은거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28 중앙 에너비스직영 퇴계로지점 주유소 앞 화단에 1989년에 설치한 ‘유성룡 집터’ 표지석이 있다. 한편 서울특별시는 1998년 4월 문화재지정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유성룡 집터 부근인 퇴계로4가 교차로에서 필동3가까지의 약 375m의 도로를 ‘서애로(西厓路)’로 지정하였다.

  • 이경하(李景夏)

    1811(순조11)∼1891(고종28)

    이경하(李景夏)

    조선 말기 무신으로 명동 중국대사관 자리에 저택이 있었다. 훈련대장 겸 좌포도대장, 금위대장,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강화부유수, 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884년 풀려나와 좌포도대장이 되고 후영사를 지냈다. 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던 무장으로 주로 군사·경찰권을 장악했으므로 그가 살던 동네이름을 딴 낙동염라(洛洞閻羅)의 별칭이 있었다.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16)∼1613(광해군5)

    이덕형

    임진왜란 때 서울을 수습한 한성부판윤으로 약전 중동 자암동 즉 중구 봉래동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한음이다. 남북인의 중간 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고 인조 때 복관(復官)되었으며 포천의 용연서원에서 제향한다. 이항복과 절친한 우정과 관련된 일화를 남겼다. 시호는 문익(文翼)으로 저서에 한음유고가 있다.

  • 이순신(李舜臣)

    1545(인조17)∼1598(선조31)

    이순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 한성부 건천동 즉 중구 인현동1가(현 명보극장앞)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이 되었으며, 덕풍부원군에 추봉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5)에는 영의정이 더해졌다. 장지는 아산의 어라산으로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서 제향을 지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저서로 이충무공 전서가 있다.

  •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4)∼1637(인조15)

    이안눌

    조선시대 동악시단(東岳詩壇)의 계관시인으로 지금의 묵정동 동국대학교 정문 안 비탈길 왼쪽에 얼마전까지만 해도 “東岳詩壇”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형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주청부사로 명나라에서 정원군의 추존을 허락 받아 원종의 시호를 받아왔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뛰어나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저서로 동악집이 있다.

  • 이지남(李至男)

    1529년(중종 24) ~ 1577년(선조 10)

    이지남

    조선 중기의 효자로 숭례문 밖 잠바위골 즉 순화동 203번지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귀양갔던 곳에서 죽자 천리를 달려가 3년간 여막에서 지내며 곡을 그치지 않았고 이 효행이 널리 나라 안에 퍼졌다. 후에 어머니 간병에 몸과 마음이 상하여 세상을 떠나자 그의 효성을 칭송하여 영응선생이라 일컬었다. 이지남가에는 충신·효자·효녀·절부·열녀 여덟분의 정문이 서게 되었고, 인조는 특별히 「효자삼세(孝子三世)」란 액자를 내리었다. 사람들은 이 집을 팔홍문가라고 불렀다.

  • 이 행(李荇)

    1478(성종9)∼1534(중종29)

    이  행

    조선시대 문학정승으로 남산 아래 예장동의 한 마을인 청학동에 서당을 짓고 여생을 여기서 마쳤다.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되었다. 기묘사화 후 우의정에 올라 대제학을 겸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찬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후에 문현(文獻)으로 개시(改諡)하였으며 저서로 용재집이 있다.

  • 정광필(鄭光弼)

    1462(세조8)∼1538(중종33)

    정광필

    조선시대 문신으로 세칭 회동(會洞)정씨를 이루었는데 회동은 곧 중구 회현동을 말한다.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 이조참판·예조판서·대사헌을 거쳐 우참찬으로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저서로 정문익공유고가 있다.

  • 정여창(鄭汝昌)

    1450(세종32)∼1504(연산군10)

    정여창

    조선시대 학자·문신으로 중구 회현동에서 살았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疎)」,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저(珍修雜著)」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소각, 지금은 정구가 엮은 문현공실기 속에 그 유집이 전할 뿐이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 때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정태화(鄭太和)

    1602(선조35)∼1673(현종14)

    정태화

    조선시대 문신으로 회동(會洞) 정씨의 일원이며 중구 회현동에서 살았다. 1637년 소현세자를 선양에 배종하고 돌아와 호령안찰사로 있을 때 명나라와의 밀약이 청나라에 탄로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봉황성에 보내 청나라의 협박을 막았다. 문집에《양파유고》 저서에《양파연기》가 있다.

  • 한명회(韓明澮)

    1415(태종15)∼1487(성종18)

    한명회

    조선시대 권신으로 중구 예장동 2번지에 그의 집이 있었다. 조선 전기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왕위에 등극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을 살해하는데 가담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관직이 삭탈되어 압구정에서 노년을 보내다 사망하였다.

  • 홍순언(洪純彦)

    1530(중종 25) ~ 1598(선조 31)

    홍순언

    조선 선조 때 역관(譯官)으로, 남대문로1가와 을지로1가의 경계되는 곳에 살았다. 종계변무(宗系辨誣)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구원군 파병에 공을 세웠으며, 종계변무에 세운 공로로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었다. 그의 일화는 정재숭의 동평위공사견문록과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옥갑야화 편, 이익의 성호사설 17권 임진재조 등에 부분적으로 전해지다가 1928년 정인보가 그의 행적을 기술한 당릉군유사징을 편찬하여 널리 알려졌다.

  • 홍양호(洪良浩)

    1724(경종4)∼1802(순조2)

    홍양호

    조선시대 문신·학자로 남부 훈도방 진고개 즉 지금의 충무로2가에서 태어났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영조실록(英祖實錄)》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학자와 교유, 귀국 후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글씨에도 능했는데 특히 진체(晉體)·당체(唐體)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이계집(耳溪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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