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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양장점

1950년대 말부터 명동지역에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 미용점 등이 집중적으로 생기고 그에 따라 명동을 중심으로 양장점과 미장원 관련 학원·학교들도 많이 들어섰습니다. 당시 양장점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패션을 알려주는 공간이었습니다.

개요

양장점의 역할
1950년대 말부터 명동지역에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 등이 집중됩니다. 명동 외에는 뚜렷하게 상권이 형성되지 않았고 워낙 옷이 없어 어떤 옷을 팔더라도 잘 팔리던 시절이라 종로와 광교 등지에서 영업하던 양장점들도 명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서울 제일의 패션 상권이 형성됩니다. 명동에 최초로 문을 연 양장점은 한동석이 운영하던 한양장점이었고, 최경자가 운영하던 국제양장사가 제2호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1960년대까지 명동의 양장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유명한 양장점으로는 송옥, 노라노(노명장), 서수연의 아리사양장점, 엘리제, 마드모아젤, 노블, 영광사, 한(한동석), 보고(한희도) 등이 있었습니다. 당시 명동은 여성들이 새로운 유행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습니다. 양장점 디자이너들은 옷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서양 옷을 멋지게 입는 법을 지도해주는 등 코디네이터 역할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명 배우들도 영화에 출연할 땐 무조건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명동에 양장점이 들어선 배경
광복 이후 미장원과 양장점이 호황을 이루면서 수많은 기술학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서울에서도 명동을 중심으로 양장점과 미장원, 관련 학원·학교들이 많이 들어섭니다. 당시 남편을 6·25전쟁에서 잃은 미망인들에게 양재사는 좋은 직업이었습니다. 보통 양재학원은 본과(아동복과 부인복, 주로 하복의 재단과 재봉)와 연구과(동복, 주로 외투) 재단과(직업적인 재단법)를 두었으며 각 과정을 마치는데 3개월이 걸렸습니다. 9개월이면 양재 관련 기술을 모두 배우고 스스로 양장점을 개업할 정도의 기술을 익혔다고 합니다. 당시 명동의 양장점과 미장원에 근무하는 여성의 수는 각 10명 정도였습니다. 양장점은 디자이너를 비롯하여 재단사, 재봉사, 종업원, 그리고 시다(심부름 하는 사람)로 구성되었습니다. 양재사와 미용사는 겉으로는 화려해 보였지만 노동조건이 나빴습니다. 양장점은 보통 오전 7시에 개점해서 밤 10시에 폐점했다고 합니다.
브랜드로 이어진 양장점
당시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문영자씨는 지금의 ‘부르다문’, 이철우씨는 ‘마담포라’ 등의 기성복 브랜드를 만들어 성공했고, 2010년 작고한 앙드레 김은 맞춤식 부티크를 운영했습니다. 지금 한국 패션을 대표하는 진태옥·설윤형·한혜자씨도 명동의 작은 양장점에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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