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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다방의 변천사

다방은 일제강점기 때 처음 만들어져,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문화예술가들이 활동하는 종합예술의 장이 됩니다. 1970년대가 되어서는 히피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찾습니다.

개요

일제시대 명동 다방
서울에 다방이 처음 생긴 것은 3·1운동 후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펼칠 때입니다. 1923년 명치정(현 명동)에 이견(二見:후타미)이라는 명동 최초의 다방이 문을 열었고, 이어서 본정2정목에서 진고개 식료품점 귀옥(龜屋:가메야) 안에 금강산이라는 다방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 두 다방은 일본인에 의해 경영되었습니다. 천재시인 이상도 여러 번 다방을 운영하려다 망한 후 1935년에 명치정에 맥(麥:무기)이라는 다방 문을 열었습니다. 맥은 우리말로 보리라는 뜻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당시 영화연극인, 화가, 음악가, 문인들이 여기저기에다 다방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 다방 개업은 돈을 벌려는 목적보다는 일종의 유행이자 멋이었고, 손님 또한 유행과 멋을 따라 모여들었습니다. 그 당시 만들어진 다방으로는 성림, 에리자, 다이나, 프린스, 팔콘, 백룡 등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손님을 끌었던 것은 성림으로, 연속연주용의 전기축음기 등도 갖추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해방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명동 다방
광복 이후 당시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예술인들은 복잡한 세상을 작품에 담기 위해 명동거리의 술집과 다방에 모여들어 그 당시 주류 철학이었던 실존주의 철학과 함께 예술과 인생을 토론했습니다. 당시의 다방은 명치좌에서 이름이 변경된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모여들던 예술인들이 서로 일거리를 소개받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유명 예술인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젊은 문예인들이 찾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음악 공연, 미술 전시, 문학 발표회, 사진 전시회, 연극 공연이 벌어지던 종합예술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과 강제 징용, 피난으로 상해, 중경, 만주,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로 떠났던 사람들이 입국하고, 공산주의 사회체계를 거부했던 북쪽 지역 주민들도 대거 남하했습니다. 또 1953년 6·25전쟁으로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가족을 찾으러, 직업을 찾으러 남한을 돌아다녔는데 다방은 그들에게 잠깐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고, 오랜만에 서로가 만날 수 있는 약속장소, 취직자리를 찾는 면접장소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명동 다방
1960년대 말부터 1975년 초까지 명동 다방에서는 히피문화가 유행했고 장발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마초 흡연 등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다방은 명동2가 53번지에 있었던 심지다방이었는데, 1972년 2월 12일 마약 암거래와 음란행위로 인해 폐쇄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다방은 가수 이장희, 윤형주, 어니언스 등이 노래를 발표하거나 개그맨들의 발표회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던 다방의 풍경은 1975년 대마초 사건이 발생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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