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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의 다방 문화(1950~60년대, 문화예술의 중심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 6·25전쟁을 거쳐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명동의 다방은 문화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토론하고 작업하고 쉬어가는 장소였습니다.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명동
일제강점기 때 명치정(현 명동)은 본정(현 충무로)일대와 함께 조선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명동 거리에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주식과 금은을 취급하는 취급소가 있었고, 1936년도에 건축된 명치좌(현 명동예술극장) 외에 11개의 극장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명치정에는 주식거래나 그 정보를 교환하는 사람, 또 영화계의 제작자나 예술가, 본정의 쇼핑객, 그리고 할 일 없는 학생 등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3·1운동 후 문화정치를 펼쳤을 때부터 조선의 문인예술가들이 명동에 자주 들러 국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광복되기 전, 태평양 전쟁으로 패색이 짙은 일제에 의해 명동 내 다방과 술집은 모두 문을 닫게 됩니다.
광복 이후 다시 찾아온 명동의 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명동의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명동의 다방과 음악실이 다시 문을 열었고,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문인, 화가, 연극인, 무용가, 음악가들이 모여들어 작품 활동을 시작합니다. 광복 후 명동에 종합예술공연장이라 할 수 있는 봉선화 다방이 처음으로 문을 엽니다. 뒤이어 명동 파출소 뒷골목에 에덴이라 불린 명곡다방이 새로 문을 엽니다. 봉선화가 문을 닫은 후 문화예술인들은 에덴을 새로운 아지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소설가 손소희와 수필가 전숙희 그리고 이화여대 음대 교수인 유부용씨가 현재 우리은행 명동지점 바로 옆에 마돈나라는 음악다방을 개업하는데, 이 다방에는 시인, 소설가, 연극학도, 영화감독,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곳의 단골손님들로는 김동리, 조연현, 김송을 비롯한 문학인들과 김광주, 이용악 등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직전까지는 문예싸롱과 모나리자, 낙랑, 담담 등이 유명했습니다. 명동 건너편 경향신문사 옆에 플라워라는 널찍한 레스토랑 비슷한 다방이 문을 열어 김동리, 조연현, 유동준을 비롯해 청년문협 사람들과 신문사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다방이 넓고 커 출판기념회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열렸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것들이 전쟁의 포화 속으로 사라집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명동에서 문학을 논하다
6·25전쟁 후 명동은 폐허로 변했습니다. 문학인들이 많이 오던 유명 다방과 술집인 명동장과 무궁원, 돌체, 피가로도 빈터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명동에 서점이나 극장이 생기면서 시인이나 소설가, 연극학도는 물론 영화감독 등이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다방마다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이 달랐는데 문인들은 ‘모나리자파’, ‘문예 싸롱파’, ‘청동다방파’ 등을 형성합니다. 동방문화회관이 생기자 자유문학 계열의 모나리자파 문인들이 대거 이동하였으며 문예싸롱의 문인들은 1960년대에 갈채다방으로 옮겨갑니다. 청동다방은 오상순을 중심으로 가톨릭 계열의 문인들이 모여들었고, 금꿩다방은 화가들의 모임터, 라이뿌룸은 방송인들, 은하수다방은 연극인들이 주로 단골손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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