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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관광

명동의 시대별 장소적 의미

명동은 일제강점기 시기 진고개에 주거하던 일본인들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광복 이후 명동은 금융, 상업, 문화가 집중된 곳으로 성장합니다.

개요

진고개로 일본이 들어오다
조선시대 진고개는 현재 명동역에 접한 세종호텔 뒤쪽 고개를 말합니다. 좁고 협소해 큰 비가 내리면 그 물이 범람하여 충무로2가 일대는 사람의 통행이 불가능하였고, 그 후에도 땅이 질척해 걷기 힘들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 공사관이 한성조약의 강요를 통해 남산에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서 일본인들이 진고개 일대에 모여 살게 됩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를 이기자 청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종현(명동)지역, 남대문시장, 을지로 일대까지 일본인들이 차지합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명동과 충무로에 조선은행·식산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금융기관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명동 일대에는 주로 식당·까페·다방·당구장 등이 집중되었고 충무로에는 금속, 시계, 약국과 같은 전문 상점들이 많이 들어섭니다.
낭만이 있었던 1950~1960년대 국립극장 주변
6·25전쟁 이후 미군 PX가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유출된 미제 물품과 서적이 명동에 흘러들어 활기를 줍니다. 미국 서적에는 미국의 최신 패션이 담겨 있어 명동 일대에 새로운 유행을 퍼뜨렸습니다. 이후 명동을 중심으로 양장점, 양복점, 양화점 등이 많이 생깁니다. 일제강점기의 명치좌에 국립극장이 들어서자 극장 주변 다방과 대폿집으로 다양한 문화예술가들이 모여듭니다. ‘명동파’라고 불린 이들은 봉선화, 동방살롱, 문예살롱, 모나리자, 돌체, 청동 등의 다방과 은성, 포엠, 무궁원, 명동장 등의 술집과 대폿집에 모여 작품을 구상하거나 어려운 시절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습니다.
젊은이들, 명동을 즐기다
1960년대 후반 들어 유네스코회관(1967), 성모병원(1961), 오양빌딩(1964) 등의 고층빌딩이 명동에 들어섭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계기로 산업 근대화가 시작되자 한국경제는 상공업 중심의 경제체제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하여 명동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공동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남대문로2가와 을지로2가의 금융업무 시설이 증가함에 따라 중앙로변, 명동로변, 국립극장주변의 유흥오락 시설들이 점차 외곽지역과 유네스코회관 뒤편과 명동로 이면 도로변으로 이동합니다. 이 당시 명동에서는 심지다방과 오비스케빈 등과 같은 히피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이 형성됩니다.
시위대를 보호했던 명동성당
1970년대 이후 명동일대는 시위 효과가 크고, 시위자들이 피할 수 있는 치외법권인 명동성당이 있어 시위가 많았습니다. 1987년 2월 7일 수사기관의 고문으로 죽은 서울대학교 박종철 군의 국민추도회가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일이 있고, 같은 해 4·13조치로 정권 연장을 시도하려는 집권당에 대항하여 대다수 시민들이 6월 항쟁을 전개할 때, 명동에서 시위를 하던 대학생 및 시민 500여 명이 명동성당 안으로 자리를 옮겨 철야 농성을 한 적도 있습니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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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일대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