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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이시영선생동상

명문가의 후손으로 상당한 권세를 누렸으나 이를 모두 버리고 6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 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습니다. 광복 후 초대 부통령에 선출됩니다. 이 동상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정치가인 이시영(李始榮)선생의 항일구국운동과 광복 이후 민주국가를 위해 헌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6년 4월 17일 백범광장에 건립하였습니다.

개요

성재 이시영 선생의 의미
1910년 한일병합이 강제로 이루어진 후 성재 이시영 선생과 그의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들은 친족 5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을 떠납니다. 집안 가산을 정리한 자금으로 형제 모두가 독립운동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의 집안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었고 당시 10여 정승을 배출해 낸 명문가였으며 명동 일대에 대부호라 불릴만한 재산이 있었습니다. 이시영 선생 본인도 만 16세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만 37세에 이르러서는 평안남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재산과 명성은 물론 조상제사를 위한 묘답까지 처분하고는 길을 떠납니다. 이들은 1910년 말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 三源堡 鄒家街)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합니다. 경학사는 한민족 동포 내 조직을 만들기 위함이었고, 신흥강습소는 인력 중에 군사력을 양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독립군양성소가 됩니다.
임시정부를 지켜내다
이시영 선생이 북경에서 고종황제의 망명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고종황제의 죽음과 그에 따른 비폭력만세운동인 3·1운동 소식을 듣습니다. 이후 선생은 북경에서 활동 중인 형 이회영과 이동녕 및 이광과 함께 상해로 가 29명의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들과 회의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결정합니다. 그는 초기에는 법무총장직을 맡았다가 후에는 임시정부의 자금을 관리하는 재무총장을 맡습니다. 1938년 충칭[重慶] 임시정부시절 국무위원·재무부장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광복 후 후학을 기르다
광복 후 중경을 출발한 선생은 1945년 11월에 임시정부 요인 제1진으로 귀국합니다. 만주로 떠날 때 50여 명이던 대가족은 돌아올 때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고, 6형제 중에는 이시영선생만 살았습니다. 선생은 환국 후 3가지 일에 신경을 씁니다. 첫째는 정치활동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으로 활약했습니다. 둘째는 종교활동으로서 성균관총재를 맡은 것과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집중했습니다. 셋째로 선생은 교육운동에 앞장섰습니다.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여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 졸업생을 배출합니다.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습니다. 이후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1달 앞두고 초대 부통령에 선출됩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국정 운영에 반발해 1951년 자진사퇴합니다. 이시영 선생은 1953년 4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완전 통일의 그날을 못 보고 눈감으니 통한스럽다”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1가 100-115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