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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대사관저

이 건물은 1883년부터 1905년까지 미국공사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883년에 지어진 후 4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개요

정동에 자리 잡은 최초의 공사관, 미국 공사관
1882년(고종 19) 인천 제물포에서 조선은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습니다. 조약이 조인된 후 미국에서는 초대 주한전권공사로 푸트(Lucius Harwood Foote)장군을 임명합니다. 푸트 공사는 고종을 배알한 후 정동 일대에서 공사관 자리를 찾다가 정5품 한림학사 민계호(閔啓鎬 : 이조판서 민치상의 아들)의 집을 구입합니다. 이 땅은 원래 경운궁(덕수궁)에 속해 있던 땅이나 임금의 외척 세도 정치가였던 여흥 민씨 일가 소유로 넘어간 상황이었습니다. 푸트는 개인 돈으로 이 저택을 구입했다가 나중에 미국 정부에 팝니다. 당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의사이며 어의였던 알렌은 미국공사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습니다. “건물은 넓은 부지와 나무가 우거진 정원에 있었다. 뜰에는 큰 잔디밭이 쭉 뻗어 있어서 안락하고 예술적인 거주지를 이루고 있었지만, 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가 세우는 거대한 공사관 건물에 비교하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것이었다.” 미국에 이어서 연이어 한양에 들어서던 러시아, 프랑스, 일본 공사관 등은 웅장한 르네상스식 건축물을 세웠는데 미국은 공사관에 방문하는 조선인들에게 편안함을 주기 위해 한옥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미국 공사관의 변천사
이 건물은 1883년부터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긴 을사늑약이 있던 1905년까지 미국 공사관이었고, 이후 일제강점기인 1941년까지는 미국영사관으로 사용됩니다. 1940년대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이 있을 무렵에는 외교가 단절됩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1949년 3월에 초대 미국대사가 부임하면서 주한미국대사관은 반도호텔에 자리를 잡았다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으로 피난합니다. 1952년 7월 서울로 환도하면서 옛 미쓰이빌딩(현 그레뱅박물관)을 미국대사관으로 사용합니다. 이때부터 정동의 공사관은 영빈관 혹은 대사관저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1970년 12월에는 세종로에 있는 지금의 빌딩으로 미국대사관을 옮기고, 원래 있던 곳은 미국공보원(미국문화원)으로 전환하여 사용합니다. 1972년 대사관저에서 기둥이 내려앉는 소리가 나자 서둘러 개보수하고, 미국 대사 부부는 이 건물의 뒤편에 새롭게 지은 한옥에 살게 됩니다. 미국대사관저를 지칭한 하비브하우스는 당시 미국 대사였던 필립 하비브(Philip Habib)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 무렵 미국은 대사관을 서양식으로 지으려고 했으나 하비브의 끈질긴 설득으로 외관은 한옥, 내부는 서양식으로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화기의 시작점, 미국 공사관
미국공사관은 조선에 최초로 세워진 외국공사관이어서 서울에 들리는 외국인 선교사, 외교관, 교육자들은 미국대사관에 들러 안내를 받고, 호텔처럼 숙박하기도 했습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일간의 전쟁을 두려워 한 외국인들이 피신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1885년 7월에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미국대사관 근처 땅을 매입하여 배재학당을 열고, 얼마 후 정동제일교회를 열었습니다. 미국 공사관은 한국 개화기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83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