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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집터

이곳은 서애 유성룡이 어린 시절 살았던 집터입니다. 서애 유성룡은 일찍이 관리로 등용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서, 호남, 영남을 관장하는 삼도 도체찰사를 맡아 전시의 군사 업무를 관장했습니다.

개요

서애 유성룡의 어린 시절
유성룡은 경북 의성 사촌리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한양으로 올라와 건천동(현 중구 인현동)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청년이 되어서는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어 안동 도산서당에서 3년간 공부합니다. 이황은 유성룡의 지식과 됨됨이를 보고 “이 청년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고 하였답니다. 유성룡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고 지혜로워 6세에 《대학》을 배우고 9세에 《논어》를 읽고 16세에 향시에 합격했습니다. 이후 1564년(명종 19) 25세의 나이로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후 궁궐 내 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는 조선시대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 올라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노력합니다.
명재상 서애 유성룡의 업적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을 눈치 챈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발탁하고, 권율장군을 형조정랑에서 북쪽 국경지대 요충지인 의주 목사로 승진시킵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군사를 모아 거세게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원군으로 조선에 온 명나라 군대가 식량이 부족해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유성룡의 설득으로 명군은 계속 남게 되었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끕니다. 명군의 참전으로 왜적의 공격이 잠잠해지자 훈련도감을 만들어 군사를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합니다. 치열했던 전쟁이 점차 사그라지자 농토가 피폐해져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을 위해 대동법을 건의합니다. 대동법은 나라에 바치는 공물 대신 쌀을 바치는 제도입니다. 또한 문벌과 신분, 출신 지역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자는 제안도 합니다. 그러던 중 1598년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하회마을로 내려와 임진왜란을 되돌아보며 《징비록》을 씁니다. 제목인 ‘징비’는 중국의 고전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일의 근심거리를 그치게 한다.(豫其懲而毖役患)’라는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유성룡은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건천동
남산골 한옥마을로 가는 왼편 큰 길에 유성룡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이곳 건천동에서 이순신을 만난 유성룡은 자립심과 자존심이 강한 이순신의 성품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 후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6등급이나 승진시켜 전라좌수사가 되게 합니다. 건천동(乾川洞)은 이 밖에도 많은 인물이 태어난 곳입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퇴계로 228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