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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흉상

1867년 서울 중구 저동에서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난 이회영은 활발한 독립운동 활동을 펼치다 1932년 순국했고,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개요

명문가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이회영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서울 중구 저동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회영의 10대 선조는 조선시대의 명신 백사 이항복이며 이 가문은 대대로 정승과 대재학을 여러 차례 배출한 명문가였습니다. 이회영의 동생인 이시영도 대한제국의 한성재판소장이었으며 광복 후에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습니다. 이회영의 집안은 남부럽지 않은 권력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현재 가치로 수천억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이회영은 후에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 1932년 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중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회영의 이런 업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중구 명동에는 이회영의 옛 집터도 있는데, 2014년 2월 24일에 서울YWCA 앞에서 이회영의 흉상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청동 재질의 이회형 흉상은 높이 220㎝, 폭 100㎝로 종로구 우당기념관에서 기증한 것입니다.
쉬지 않고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다양한 방면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했는데요.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신민회 활동입니다.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는 많은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구국활동을 했으며 독립군 양성운동과 계몽·강연·출판 등으로 국민들의 애국심과 국권회복 의식 등을 고취시켰습니다. 신민회의 독립군 양성운동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으로 이어져 많은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이 밖에도 민족교육을 위한 서전서숙과 상동청년학원 개설, 교민자치단체 경학사 조직, 항일구국연맹 조직 등 이회영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수많은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
이회영의 독립운동 활동 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 신흥무관학교 설립입니다.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신민회 인사들은 1911년 만주로 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웠습니다. 1913년에는 신흥중학교로 개칭을 하고 군사훈련을 하다 1919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간 약 2,000여 명의 졸업생들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 등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여러 사정으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에 폐교를 하게 됩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3 YWCA회관 앞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