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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인 명동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주교좌 성당으로 한국천주교회의 상징적인 건물입니다. 프랑스인 코스트(Eugene Joan George Coste) 신부가 설계하고 1898년에 완공됐으며 1,000여 명에 가까운 신도들의 자원봉사로 지어졌습니다.

개요

명동성당이 지니고 있는 의미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분주한 명동 중심부에 명동성당이 있습니다. 종탑까지의 높이가 무려 45m에 달하는 명동성당 경내에 들어서면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사랑과 평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우선 엄격한 유교를 기반으로 했던 조선시대에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박해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명맥을 이어 온 한국 천주교 역사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1970~80년대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강했던 시절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과 학생들을 보호한 치외법권의 공간이었던 것도 명동성당이 지니고 있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예배가 이뤄졌던 명례방
한국 천주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외부의 전도 없이 주체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계층인 양반들, 그 중에서도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선진문물에 관심이 많던 실학자 중 남인이 천주교를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 함께 공부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곳 명동에 위치했던 명례방 공동체에서 천주교를 학문이 아닌 종교로 인정하고 학자 수십 명이 미사를 봅니다. 그러던 중 1785년 집회가 발각되어 김범우(세례명:토마스)가 유배지로 떠나 사망합니다. 이때부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이후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수많은 천주교 지도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평신도들은 산골로 숨어들어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1882년 프랑스인 교구장 블랑(Marie Jean Gustave Blanc) 주교가 명동에 위치한, 이조판서를 지낸 윤정현의 대저택과 근처에 있던 김범우 명의의 명례방 터를 같이 구입하고 1887년에 성당을 세우기 위한 터 닦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정부와 토지 분쟁이 있었으나 1890년에 분쟁이 일단락되고 공사가 재개되어 1898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명동성당의 숨은 건축 이야기
1892년(고종29) 8월 5일 블랑(Marie Jean Gustave Blanc)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Gustav Charles Marie Mütel) 주교가 명동성당 정초식을 가지면서 한국 천주교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 은인들의 명단을 머릿돌 밑에 묻고 축성 기초하였습니다. 성당의 설계와 공사 감독은 코스트(Eugene Joan George Coste) 신부가 맡아 진행하였으나 1896년 2월 코스트 신부가 별세함에 따라 프와넬(Victor Louis Poisnel) 신부가 이어받아 완공하였습니다. 많은 신자가 헌금을 내고, 자원봉사를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당 천정은 라틴 십자가형 삼랑식의 장중한 고딕형이며, 내부는 왼쪽에 1952년 설치한 79위 복자 제대 및 복자 상본과 김대건 신부상이 있고, 오른쪽엔 세례를 위한 세두대 대리석과 건축가의 주보성인 성 베네딕토상이 있습니다. 명동성당 지하에는 박해 때 순교한 성인의 유해를 모셔놓았습니다.

상세정보

  • 전화번호

    02-774-1784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