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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탑

남산공원 안에 있는 3·1독립운동기념탑은 1919년 3월 1일에 일제의 지배에 저항해 한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만세운동을 벌인 것을 기념해, 1999년 3월 1일 만세운동 80주년을 맞아 3·1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개요

일본의 강제로 맺어진 거짓조약, 을사늑약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동의 없이 을사오적 대신들의 동의만 얻은 상태였지만 을사늑약을 맺었다고 덕수궁 중명전에서 선언하고선 조약 내용을 강제 집행합니다.
고종황제는 1907년 6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보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외면과 일본, 영국의 방해 때문에 실패하고 맙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이 외교권을 일본에 모두 이양한다는 을사늑약 내용을 어긴 것이라며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킵니다. 이로 인해 고종 황제는 덕수궁 함녕전에 갇히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합니다. 1910년 이완용, 박제순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을 통해 한일병합조약 합의를 맺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열어 결의합니다.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됩니다.
일제의 탄압과 수탈
일본은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민족문화를 말살시키고 경제를 침탈합니다. 민족자본가 계급은 민족자본의 성장을 억제한 회사령(1910)으로 큰 타격을 받았으며, 농민의 경우 토지조사사업(1910~1918)으로 조상에게 물려받은 토지를 빼앗겼고, 이후 도시로 흘러들어 노동자가 된 농민은 일본인 노동자의 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민족차별 등으로 끼니를 거르는 처참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3·1만세운동으로 하나가 된 조선
1919년, 고종황제의 독살 소문이 전국으로 퍼지자 수많은 민중들이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옵니다. 3·1만세운동을 주도한 33인은 수많은 민중들이 장례식에 몰릴 것을 예상하고,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오늘날 종로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삼창을 합니다. 이와 비슷한 시각 종로 탑골공원에 모인 5,000여 명의 학생들도 팔각정에 올라선 독립운동가 정재용의 독립선언서를 듣고 만세를 부른 후 함께 시위에 나섭니다. 이들 시위 행렬에 수만의 서울 시민들이 참여합니다. 시위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몇 개월에 걸쳐 만세 운동이 지속됩니다. 당시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 3,089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된 인원이 5만 2,770명이고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가 불에 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3·1운동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 평화운동이며 세계 최초의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종교연합운동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무저항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 산14-81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