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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열사 동상

유관순열사는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3·1운동에 17세의 어린 나이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유관순열사동상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서울신문사)의 주관으로 1970년 태평로(남대문 뒤쪽)에 건립되었다가 1971년에 이전하여 현재 장충동 남산공원 장충자락에 위치합니다.

개요

유관순의 어린 시절
유관순은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여자치고는 큰 키인 169cm에 다부진 체격이었다고 합니다. 고집 세고 장난기가 많았는데,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화학당 기숙사에서 자기 전 기도를 할 때 보통은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하는데 낮에 친구가 싸왔던 명태반찬이 맛있었던 유관순은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말해 모두 웃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사촌 동생에게 뜨개질로 모자를 선물하는 섬세한 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담을 넘어 3·1운동에 참여한 유관순과 이화학당 친구들
유관순은 이화학당 내 비밀결사 이문회를 통해 3·1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6명의 친구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사람들이 학교 앞을 지나가자, 유관순은 친구들과 함께 담장을 뛰어넘어 동참했습니다. 이후 서울 시내 곳곳의 독립만세운동이 식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주동세력이 모인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립니다. 유관순은 그길로 고향에 내려가 만세운동을 전파하기로 합니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유관순
고향 병천에 온 유관순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쓴 아줌마 차림으로 천안, 안성, 진천, 청주 일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며 아우내 장터에서 있을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합니다. 1919년 4월 1일 오전 9시경 아우내 장터에 3,000명이 넘는 민중이 모여듭니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단상에 올라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합시다."라고 부르짖습니다. 이후 흥분한 군중들이 거리 행진을 시작합니다. 엄청난 인원과 열기에 놀란 일본군은 당황해서 물러났다가 다시 와 군중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합니다. 그 자리에서 유관순의 부모님을 포함하여 19명이 세상을 떠나자 유관순은 부모의 죽음을 항의하다가 구속됩니다. 범죄를 인정하면 풀어준다는 일본판사에게 그녀는 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며 침략한 일제가 물러나야 한다고 계속 저항합니다. 이후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지만 형무소 안에서도 1920년 3월 1일에 다시 동지들과 옥중만세운동을 펼쳤고 그로 말미암아 어둡고 축축한 독방에 갇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1919년 10월에 양명이란 여자가 출산으로 감옥에서 나갔다가 11월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유관순은 빨래를 해 축축한 어린애 기저귀를 자기 몸에 감아 체온으로 말려 주는 등 어려운 와중에도 인정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 독립의지와 민족의 기개를 잃지 않던 유관순은 1920년 10월 12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18세의 나이에 순국합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단로 101 남산공원 내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