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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열사 동상

이준열사는 고종의 특사로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의 방해, 열강의 무시로 참석하지 못해 헤이그에서 병을 얻어 순국했습니다. 이 동상은 1964년 사단법인 일성회(一醒會)가 순국열사 이준의 숭고한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장충단공원 안에 건립한 동상입니다.

개요

이준열사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삼촌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1887년(고종 24)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함흥의 순릉참봉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법관양성소에 입학합니다. 1896년 2월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됩니다. 곧이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기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 귀국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1898년 독립협회에서 계몽활동을 하고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했습니다. 1904년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대한보안회를 조직, 총무를 맡아 반대투쟁을 벌입니다. 대한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다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맡아 결국 일본의 요구를 무산시켰습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지어 동지들과 함께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며 이후에도 다양한 애국·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1906년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헤이그만국평화회의장으로 떠나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비밀리에 고종을 만나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이 고종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거짓조약임을 알려야 함을 건의해 동의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명칭,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합니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참석하려 했으나 이미 일본의 보호 속에 있는 국가는 참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정부 측과 만나려 했으나 그것조차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전후하여 열강들에게 무시당하는 한국대표의 사정이 신문기자들에게 알려져 여러 신문에 나오고, 영국인 윌리엄 스테드가 회장인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회보인 〈쿠리에르 드 라 콩페랑스(Courrier de la Confé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하기도 합니다. 이후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여 큰 호응을 얻고 연설 이후 각국 신문에서 일본의 무단폭력에 의한 조약을 보도해 힘을 얻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회의단 대표들은 대한제국 대표단을 외면합니다. 노력을 해도 끝내 세계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이준 열사는 병을 얻어 묵고 있던 호텔에서 7월 14일 생을 마감합니다.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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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57-10(장충동2가 197)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