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중구 문화관광 로고

모바일 전체 메뉴
사이트맵 닫기

중구관광

장충단비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위해 1900년(광무 4)에 설치했던 제단이 있던 곳으로, 그 다음 해에는 임오군란·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충신들도 같이 모셨습니다.

개요

을미사변 때 순국한 문·무신을 위한 장충단
장충단의 시작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을미사변은 친일파를 멀리하고 친러파를 등용하려 하였던 명성황후를 당시 일본공사관과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살해한 사건을 지칭합니다. 고종황제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5년이 지난 1900년 9월 을미사변 때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 영관 염도희·이경호와 대관 김홍제·이학승·이종구 장병의 위패를 장충단에 마련하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1901년 군인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안된다는 육군법원장 백성기의 의견에 따라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국한 문신들도 함께 모셨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장충단에 대한 백성들의 존경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장충(獎忠)은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입니다.
장충단,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때 사라지다
장충단은 한일병합이 있던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 짓고 수천 그루의 벚꽃을 심고 연못과 놀이터를 설치하였으며,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제사를 올리는 박문사를 건립하였습니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으며, 장충단 사당과 부속 건물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파손되어 사라졌고 현재는 장충단비만 남았습니다. 장충단비는 사당과 함께 원래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는데 사당은 없어지고 장충단비만 1969년 현재의 자리인 수표교 서쪽으로 옮겨졌습니다.
장충단비에 새겨진 글
장충단비의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는 순종이 쓴 것이며, 뒷면에 새겨진 글은 육군부장 민영환이 고종의 칙령을 받아 쓴 글입니다. 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데 우리 대황제폐하께서는 자질이 상성처럼 빼어나고 운수는 중흥을 만나시어 태산이 만석과 같은 왕업을 세우시고 위험의 조짐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가끔 주춤하기도 하셨는데 갑오·을미사변이 일어나 무신으로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들이 많았다. 아! 그 의열은 서리와 눈발보다 늠름하고 명절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길이 재향을 누리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 그래서 황제께서 슬퍼하는 조서를 내려 비를 세워 표창하며 기리고 봄가을로 제사드릴 것을 정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보이고 풍속으로 삼으시니 이는 참으로 백세에 보기 드문 가르침이다. 사기를 북돋우고 군심을 분발시키는 진실이 여기에 있으니 아! 성대하다, 아! 성대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정부 수립 후 장충단공원은 장충단비, 3·1운동 기념비,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 만해 한용운 시비와 유관순열사 동상, 이준 열사 동상, 김용환 선생 동상 등 항일운동과 관련된 유적이 들어선 민족공원이 되었습니다. 1988년 이후 중구청에서 매년 10월 8일에 추모제를 올리다가 현재는 중구문화원 주최로 장충단 추모제 제례위원회를 구성하여 지역주민과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57-10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