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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관광

백범광장

남산야외음악당광장에 1968년 8월 백범광장이 조성되었습니다. 백범광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입니다.

개요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위인, 김구
김구 선생은 조선말부터 광복 이후 암살되기까지 개인의 사심을 버리고 오직 국가와 민족의 광복을 위해 몸소 희생한 분입니다.
김구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8세의 어린 나이에 300명이 넘는 해주 동학농민운동의 접주가 되어 지휘하다가 일본군에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을 갑니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후에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하였다가 사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형당하기 직전 고종의 명으로 사형을 피하고 이후 탈옥합니다. 그후 만주 의병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다가 1910년 이후 백성들을 계몽하는 활동을 합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이 되었습니다. 1925년 임시정부가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로 개조할 때 최고위직인 국무령에 선출된 이후 임시정부활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1931년에는 의열투쟁을 위한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후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본천황 폭탄 투척과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의거를 뒤에서 도왔습니다. 1940년에는 중경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등 이념에 상관없이 모든 독립군이 동참하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광복군을 거느립니다. 1944년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조직하여 미국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우리 힘으로 조국 광복을 이루려 하였으나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광복을 맞이합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해 고국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미군정이 임시정부 주석 자격으로 입국하지 못한다고 하여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해 반탁운동을 펼치지만 남한과 북한은 따로 정부를 수립합니다. 이후 자주독립 국가를 위해 노력하던 중 1949년 6월 26일 자택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 의해 피격당합니다. 임시정부가 해체되려고 할 때마다 그의 노력으로 유지되었고,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습니다.
백범광장에 있는 동상들
일제강점기 남산공원에는 조선신궁을 비롯한 일제의 시설들이 많았으나 정부수립 후 항일민족운동을 기리는 기념물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백범광장 안에는 백범 김구 동상, 김유신 장군 기마상, 성재 이시영 동상, 조지훈 시비가 있습니다. 성재 이시영은 대한제국시절 한성재판소장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형제 모두와 상의 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많은 독립군을 배출합니다. 조지훈은 낙화와 승무를 쓴 시인입니다. 민족의 한을 고전적 미를 통해 드러냈습니다.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1946)》을 간행하였습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 100-115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