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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관광

구 국회의사당(서울특별시의회 청사)

이곳은 1933년부터 1935년에 걸쳐 경성부청(현 서울시청) 서쪽 건너편에 경성부민(서울시민)을 위해 세운 다목적 건물입니다. 건립 당시에는 경성의 시민회관 역할을 했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들의 사교장, 국립극장, 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을 거쳐 현재는 서울특별시의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개요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구 국회의사당
구 국회의사당 건물은 1935년 준공되어 ‘경성부민관’으로 불리며 대규모 문화전당으로 사용됐습니다. 경성에 독점적으로 전기·가스를 공급하고, 전차를 운영하던 경성전기주식회사가 100만원을 기부하여 지어졌습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철근콘크리트 건축물로 수용 인원 1,800명의 대강당이 있는 본관에 특별실, 사교실, 집회실을 두었고, 400석의 중강당, 160석의 소강당 등이 별관에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장식을 배제하고 건물 각 부분의 크기를 조정하여 균형감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당시 건축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건물의 설계는 강연회, 사교, 오락, 연극, 영화 상영, 음악회, 무용공연, 결혼식 등을 할 수 있도록 조명, 색채, 음향, 냉난방 설계 등이 되어있었습니다.
경성부민관이 세워진 이곳은 고종황제의 후궁인 엄귀비의 신위를 모시던 덕안궁이 철거되고 지어졌지요. 엄귀비는 명성황후를 모시던 상궁이었는데, 1897년 아관파천 때 고종과 왕세자를 자신의 가마에 몰래 태워 러시아공사관으로 모시기도 했습니다.
광복 직전 한국독립운동의 맥을 이은 ‘부민관 폭탄 의거’
광복을 앞둔 1945년 7월 부민관에서 친일파 박춘금이 전쟁에서 패배를 눈앞에 둔 일본을 위해 전시 동원 연설을 시작합니다. 당시 유럽에서의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태평양과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패배가 확실시 되었지만, 일본 군부는 친일파를 동원해 마지막까지 한국인을 전쟁 속으로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연설이 시작된 10여분 후 대한애국청년단이 설치해 놓은 폭탄이 터집니다. 부민관 강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참석 중이던 1명은 즉사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습니다. 이 사건은 ‘부민관 폭탄 의거’로 대한애국청년단인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우동학, 권준 등이 계획한 것입니다. 경성을 통치하던 경성부청사와 일본인들이 밀집한 명동, 남산 지척인 이곳에서의 독립의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경성부민관, 광복 이후 국회의사당이 되다
이 건물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미군정청의 소유로 넘어가 미군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됐습니다. 건물 안에는 아직도 당시 미군이 쓰던 당구대가 남아 있습니다. 1949년 서울시로 소유권이 이전된 후 1950년부터 6·25전쟁 이전까지 국립극장으로 사용됐습니다. 6·25전쟁 이후 국회의사당이 되면서 현대사에 수록된 큰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국가 조직의 기본을 이루는 근대민법 제정, 내각책임제 개헌, 유신헌법 제정, 월남파병 동의도 이곳에서 이뤄졌습니다. 1975년 여의도에 새롭게 국회의사당이 들어서면서 철거될 뻔했지만, 1976년 시민회관으로 일시 사용되었습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서울특별시의회 청사로 쓰이고 있으며 2002년 등록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5 지도보기

  • 지정현황

    등록문화재 제1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