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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이곳은 1890년대 각국 공사관 및 선교사, 조선 개화파 등이 자주 찾던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입니다. 1975년 이화여고 프라이홀(Frey Hall)이 화재로 철거된 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 개관하였습니다.

개요

손탁호텔은 어떻게 세워졌나?
손탁호텔은 1902년에 지어진 2층 양옥 호텔로 대한제국 황실에서 거금을 들여 지었습니다. 1층에는 보통실과 식당을 두고 2층은 귀빈실로 썼습니다. 호텔 이름에 쓰인 손탁이라는 독일 국적의 사람은 개화기 당시 정동 사교계의 중심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녀는 웨베르 러시아공사관이 한국에 입국할 때 같이 들어왔습니다.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를 할 줄 알았던 그녀는 조선말조차 짧은 시간에 배워 당시 외국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명성황후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명성황후와의 만남은 러시아 공사 부인의 소개로 이루어졌습니다. 요리솜씨가 뛰어났던 손탁여사는 이후 경복궁 왕실에 드나들면서 서양 요리를 만들고 외빈을 접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의 발생으로 위기를 느낀 조선 왕실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자 조선에 세력을 뻗칠 기회를 엿보던 일본군도 들어와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조선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던 청나라가 대패하여 물러난 후 일본은 1894년 7월 경복궁에 무단으로 침입·협박하여 친일인사들로 꾸며진 김홍집내각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군국기무처를 통해 제1차 갑오개혁을 실시합니다.
나라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을까 불안해했던 명성황후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청나라에서 밀어낸 러시아를 끌어들이려합니다. 이때 손탁이 명성황후와 러시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여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합니다. 그 공로로 손탁은 왕실 소유의 정동 29번지 한옥집을 하사받아 1895년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사교장을 개설하게 됩니다. 1902년 같은 자리에 손탁호텔이 들어선 후 서양인, 일본인, 정치가, 서양인 선교사들이 찾는 유명한 여관 혹은 모임장소가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맺을 당시 숙박하였고, 처칠수상도 이곳에 묵었습니다.
프라이홀에 이어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 들어서다
손탁호텔이 1918년 문을 닫은 후 이화학당의 기숙사로 사용됩니다. 그 후 1922년 기숙사를 허물고 같은 자리에 프라이홀(Frey Hall)을 새로 짓습니다. 이 건물은 이화학당 4대 학장이었던 프라이(Lulu E.Frey)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1923년 완공된 프라이홀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건평 2,360m²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이화대학교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져, 내부에는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와 더불어 500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수업 가능한 교실과 실험실 등이 있었습니다.
프라이홀은 1975년 화재로 소실되고 같은 자리에 이화학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 건립됩니다. 프라이홀의 복원을 위해 30년간 졸업생들이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멀티미디어교육관으로 강의실과 카페 등의 부대시설과 함께 1층과 2층에는 공연장이 있습니다.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어 매년 많은 공연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상세정보

  • 전화번호

    02-777-4258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6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