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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는 1895년(고종 32) 착공하여 1897년(광무 1) 10월에 준공된 개신교 교회 예배당입니다.

개요

근대시기 정동제일교회의 역할
정동제일교회는 한국의 개신교 교회로 이곳에서는 1800년대 후반 근대화가 한창 이루어지던 시절 민중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교육 그리고 독립협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정치적인 활동이 이뤄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박사, 한글 대중화를 이끈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과 같은 분들도 이곳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서구 열강과 동아시아 열강들이 몰려들던 시기에 외국어를 하고 서구의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는데 이들이 바로 그런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이들이 공부한 배재학당의 교장이기도 했습니다.
정동제일교회의 초기 모습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가 1885년 자신의 사저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이 교회의 시초입니다. 1887년 아펜젤러는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마련해 벧엘예배당이라는 이름을 짓습니다. 1888년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교인 수가 많이 늘어나 1892년에 예배당 건축을 결심하게 됩니다. 아펜젤러는 공사에 필요한 비용을 미국 감리교의 도움을 받고 친지, 친구에게도 부탁하고, 국내 신도들의 헌금을 받아 정동제일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공사는 1895년 시작하여 1897년 10월에 마무리되었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예배당 준공에 따른 봉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파이프오르간과 유관순
정동제일교회 내부 정면에는 1918년에 설치된 우리나라 최초의 파이프오르간이 있습니다. 이 파이프오르간에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3·1운동 당시 일본 헌병에게 쫓기던 유관순 열사가 오르간 뒤에 숨었다가 무사히 도망쳤고, 이후 고향 병천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에서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후에 유관순은 3·1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죄명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숨을 거두고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유교 가치관이 엄격한 조선말에는 정동제일교회 안이라도 남녀 학생들이 따로 앉았고 사용하는 문도 달랐다고 합니다. 배재학당 학생들과 남자 신도들은 교회 남쪽 문으로 들어왔고, 이화학당 학생들과 여자 신도들은 북쪽 문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서로 눈 마주칠 새도 없이 교회 가운데 휘장을 사이에 두고 따로 앉았다고 하는군요. 191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휘장이 철거되어 자유롭게 예배를 보았다고 합니다.
개화기 당시 정동제일교회는 붉은 벽돌의 아름다운 서구식 교회건물과 그곳에 다니던 젊은 학생들의 진취적인 모습이 이채로워 많은 인파가 찾던 명소였습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6 정동교회 지도보기

  • 주차

    주차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