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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러시아공사관

1890년(고종 27)에 러시아인 사바틴(A.I.Sabatin)이 설계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입니다. 본관은 6·25전쟁 때 파괴되었고,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이 남았습니다. 고종이 일본의 무력 압박을 피한 아관파천의 현장으로 유명합니다.

개요

구 러시아공사관의 위치
구 러시아공사관은 정동에서 제일 높은 정동공원 위쪽에 위치합니다. 정동공원은 정동길을 따라가다가 캐나다대사관 옆 샛길로 접어들면 보입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하얀 탑의 형태로 남아있지만 사실 탑은 아니고 공사관 건물의 일부인 전망탑입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붕괴되고 전망탑 일부만 남았다가 1973년 보존공사를 한 것입니다. 건물 3층의 반원 아치형의 창과 삼각형 페디먼트의 지붕은 그 당시 건축유행을 보여줍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800년대 후반 정동에서 가장 높고 큰 건물이었으며 위치도 좋았습니다. 이곳에서 굽어보면 정동 내에 있던 미국·영국·프랑스공사관의 내부가 모두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동지역은 교통이 편했습니다. 경복궁과도 가깝고 서대문, 남대문, 서소문을 통해 뱃길이 있는 마포와 영등포를 지나 인천항으로 바로 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아관파천의 시대적 배경
명성황후는 거듭 압박해오는 일본을 막기 위해 청나라를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대만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자 일본의 팽창이 신경 쓰였던 러시아의 주도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일본에게 중국의 랴오둥반도를 반환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사건을 삼국간섭이라고 합니다. 서양의 강국인 세 나라에 대적할 수 없었던 일본은 물러나게 되고 이후 러시아가 동아시아의 패권을 잡습니다. 이를 눈여겨 본 명성황후는 조선에 세력을 뻗치는 일본을 막기 위해 러시아에 접근합니다.
일본에겐 자신들을 방해하는 명성황후가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래서 미우라 공사와 자객 옷을 걸친 일본 군인들이 경복궁에 침략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당시 고종은 건청궁에서 을미사변의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날 밤 이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매일 미국선교사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침실 옆방에 권총을 들고 대기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경복궁 안에까지 일본 첩자가 수시로 다녔고, 궁궐을 호위하는 군인들 중에도 일본과 내통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변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결국 고종은 1896년 2월에 왕세자와 함께 가마를 타고 몰래 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합니다.
대한제국 준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을 갔지만 단순한 피신만은 아니었습니다. 공사관으로 매일 찾아오는 대신들과 자주적인 개화를 준비 했고, 폐허 같던 경운궁을 수리하고 확장시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1년이 지난 1897년, 어려운 시기를 견딘 고종은 아관파천을 끝내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탄생을 황제로서 하늘에 고합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1-18 정동공원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