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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관광

덕수궁 중명전

1901년에 지어진 중명전은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에 포함된 건물로서 접견소 및 연회장, 도서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07년에 황태자 가례의 연회가 거행된 장소이며,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부터 외국인에 임대되어 경성구락부로 이용되었습니다.

개요

덕수궁의 화려한 연회장이었던 중명전
중명전은 황실도서관으로 세워진 이후 고종황제가 외국 귀빈을 만나는 접견소나 연회장 역할도 하였습니다. 원래는 수옥헌으로 불렸다가 1904년부터 중명전으로 불리게 됩니다. 중명전은 1907년 1월에 황태자(순종)와 윤비의 가례가 거행될 때 외국사신을 위한 초청연회가 베풀어진 장소이기도 합니다.
대한제국의 아픔이 서린 중명전
중명전의 화려한 건물 이면에는 아픈 기억들이 있습니다. 1904년 경운궁의 모든 건물이 완공되고 안정을 찾을 찰나, 일본인의 방화로 추정되는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전각들 대부분이 불에 타 고종은 어쩔 수 없이 벽돌로 만들어진 중명전으로 집무실을 옮깁니다. 을사늑약도 1905년 11월 17일 이곳에서 벌어졌는데요. 일본 국왕으로부터 친서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가 중명전으로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초청합니다. 당시 일본은 남산 위에서 경운궁을 향해 야포를 겨누고, 덕수궁 주위로 군대를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몇 시간에 걸쳐 고종황제를 회유, 겁을 주지만 화가 난 고종황제는 조약에 도장을 찍지 않습니다. 곧이어 이토 히로부미는 강력하게 조약에 반대하는 한규설 대신을 중명전 휴게실에 가두고,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에게 동의를 강요하여, 외부대신 박제순을 대표자로 서명 날인하게 합니다. 군주제였던 대한제국은 외국과 조약을 맺을 때 최고 통치자인 황제의 도장이 필요한데 대신들의 서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을사늑약은 중명전 2층 휴게실에서 이뤄졌습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타국과의 외교권도 빼앗기고 명목상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됩니다.
주인 잃은 중명전의 수모
중명전은 1915년부터 경성구락부에 임대되어 1960년대까지 정동에 살던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외벽과 내부의 복도만 남긴 채 대부분 타버리는 화재를 겪으면서 파손됩니다. 그 이후에는 복구하여 사용되다가, 1963년 일본에 있던 영친왕 이은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귀국하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돌려줍니다. 2004년 문화재청에 인수되어, 2009년 복원에 착수하여 2010년 공사를 완료하였고, 현재는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습니다. 건물 1층에서는 조선말부터 대한제국 시기까지 중명전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상세정보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지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