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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옛 명칭은 경운궁이었는데 1907년부터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6만 1500㎡의 면적에 대한문, 중화문, 광명문과 중화전, 준명당, 석어당, 석조전, 함녕전, 즉조당 등의 전각이 남아있습니다.

개요

파란만장한 조선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공간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은 조선의 4대 궁궐 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와 임시거처로 있으면서 정릉동행궁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 1611년에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1907년부터는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덕수궁은 조선역사에서 파란만장했던 시기의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인조반정의 소용돌이와 선조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
인조반정은 1623년에 서인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입니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파가 집권하였습니다. 대북파는 광해군의 어린 이복동생인 영창대군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영창대군을 낳은 인목대비까지 폐위시키는데요. 이 사건을 ‘계축옥사’라고 합니다. 계축옥사 등으로 광해군에게 반감을 가진 세력들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에 정변을 일으켜 성공합니다. 이들에 의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이종은 덕수궁의 즉조당에서 즉위하여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가 됩니다. 폐위됐던 인목대비는 존호를 회복하고 광해군은 인목대비에 의해 덕수궁 석어당 계단 아래 꿇어앉는 굴욕을 당한 끝에 결국 왕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맙니다. 인조가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한 이후 덕수궁은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덕수궁의 석어당은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와도 연관된 일화가 있습니다. 석어당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을 갔다가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 간 머물던 곳이며 선조는 재위 41년째인 1608년 2월에 석어당에서 찹쌀밥을 먹다가 기도가 막혀 승하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역할과 이름이 변화한 덕수궁의 관문, 대한문
대한문에는 문이 3개가 있는데, 이는 신분에 따라 출입을 달리 하기 위해서입니다.
가운데 있는 큰 문은 어문이라고 하여 임금이 드나들었고 양쪽의 문은 문반과 무반 등의 신하들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지금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지만 원래 대한문은 동문이었고 인화문이 덕수궁의 정문이었습니다. 대한문이 정문이 된 것은 1900년경입니다. 당시 도시개조사업으로 인해 도로가 개통되고 서울의 중심이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연결되면서 대한문이 정문의 역할을 하게 됐습니다. 대한문이라는 이름도 나중에 바뀐 것으로 그 전에는 대안문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일어났고, 1906년에 불타버린 건물들을 수리 하면서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위해 이름을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을 가진 대한문으로 바꾸게 된 것입니다.

상세정보

  • 전화번호

    02-771-9951

  • 도로명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지도보기

  • 지정현황

    사적 제124호

  • 휴무일

    매주 월요일

  • 이용시간

    매표 및 입장시간 09:00 ~ 20:00 퇴장시간 09:00 ~ 21:00

  • 이용요금

    대인(만25세이상) 1,000원단체 대인(10인이상) 800원

  • 장애인 편의시설

    휠체어대여

  • 체험안내

    전통의상 입어보기, 수문장 교대의식 체험